차는 이와 같이 겨울이라면 창밖에 외롭게 앉은 까마귀라도 바라보며 호올로 마시는 게 좋다. 술은 인생을 잠재우며 마시는 데서 그 맛이 나는지 모르지만, 차는 인생을 깨우며 인생을 곰곰이 생각하며 마시게 된다.
사람들은 호올로 있을 때에 자기 자신을 돌이켜보고 또 자신을 확대한 인생을 생각하여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커피를 끓이면서」 中
김현승 시인은 「가을의 기도」「플라타너스」「기도」 등의 시편뿐 아니라 커피 마니아로도 유명하다. 오죽이나 커피를 좋아했는지 스스로 호를 ‘다형(茶兄)’이라고 지었다. 이때의 ‘차[茶]’가 다름 아닌 커피다. 그는 매일 아침 집 가까이 있는 다방에 가서 커피를 마시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집에서 직접 커피를 내리기도 했는데 그럴 땐 커피를 사발로 마셨다고 한다.
커피를 사발에 마셨다고 하니 일견 무식해 보이지만, “커피에 대한 나의 지식은 매우 해박하다.”라고 자평할 만큼 그는 커피에 조예가 깊었다. 위에 인용한 「커피를 끓이면서」를 비롯하여 「나의 커피론」「커피의 즐거움」 등 그가 남긴 산문을 보면 입이 쩍 벌어질 정도다. 김현승 시인은 1913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나서 1975년 4월 숭전대학교(지금의 숭실대)에 강의를 나갔다가 채플 시간에 쓰러져 삶을 마감했다. 지금처럼 커피가 대중화되지 않은 시절을 살았음을 염두에 두면 그의 글은 더욱 놀랍다.
우유나 홍차와 같이 싱겁지도 않지만, 술과 같이 강하거나 미치광이를 만들지 않으면서도, 약간의 자극성과 볼륨이 있어 적당히 흥분시키고 때로는 적당히 진정시키는 양면 작용을 능히 해내는 음료란 우리의 일상생활에 있어서 커피밖에 또 무엇이 있는가.
우리가 필요로 하는 커피도 우리가 그것을 능력껏 다루지 못하면 그 맛을 충분히 낼 수가 없고, 맛없는 커피란 맛 좋은 냉수만도 못한 것이다. 커피를 제대로 끓이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다음과 같은 여덟 가지 철칙을 꼭 지켜야 한다.
-「나의 커피론」 中
시인 김현승
이어지는 글에서 김현승 시인은 커피를 내리는 방법과 각각의 특징을 자세히 설명한다. 다른 글에서는 원두의 이름과 산지, 그 맛의 특색을 세밀하게 분석하기도 한다. 그 일단을 보자면 이렇다. “정통적인 커피 맛을 취하려는 사람은 브라질 산토스 40%, 모카 30%, 콜롬비아 30%를 배합하고, 산미(酸味)가 많은 커피를 즐기려는 사람은 콜롬비아 40%, 모카 30%, 브라질 산토스 30%를 배합하고, 짙은맛을 즐기려는 사람은…” 이런 얘기들은 누구에게 듣거나 따로 공부한 것이 아니라 시인이 오롯이 체득한 것이다. 「커피의 즐거움」을 보면 그는 근래에야 잘 알려진 더치커피까지 섭렵하고 있었다. 커피에 관한 용어조차 생소한 시절에 경험으로써 웬만한 바리스타 못지않은 식견을 갖춰다는 게 새삼 놀랍다.
나는 누구보다도 고독을 사랑한다. 거절할 수 없는-떼어버릴 수 없는 고독이 나를 따라다니며 떠나지 않는 것이라면, 나는 차라리 그를 사랑하며 그와 함께 나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가을은 그 어느 때보다도 인간의 고독을 깨닫게 하는 계절이다. 가을이 오면 나는 깊은 밤에 홀로 차를 끓이며 그 어느 때보다도 나의 고독을 뼈저리게 느낀다. (…중략…) 가을이 점점 깊어간다. 밤에 홀로 차를 끓이는 나의 고독도 깊어간다.
-「커피를 끓이면서」 中
김현승 시인을 흔히 ‘고독의 시인’이라고 부른다. ‘고독’을 자기 시 세계의 주요한 화두로 삼은 까닭이다. 그가 커피를 좋아한 것도 그것이 고독과 잘 어울리기 때문이었다. 시인은 현대사회가 사람들에게서 ‘고독’을 빼앗아가고 있다고 염려한다. “생각하기 위한 고독을, 정신의 고지를 점유하여 인생에 대한 시야를 가없는 영원에까지 넓힐 수 있는 이 고독을, 사람들은 사회적인 행동과 결부시킬 때에는 고립과 연약과 무능으로까지 간주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는 참다운 고독감은 사회적인 고립이나 무능과는 다르게 오히려 사회적인 활동에 있어 인간을 더욱 굳세게 만든다고 말한다.
김현승 시인은 커피를 마시는 동안 내면의 ‘절대 고독’을 응시하며, 나아가 삶과 신의 의미를 궁구했다. 그에 따르면 커피와 인생은 다르지 않다. 시기도 하고 달기도 하고 쓰기도 한 커피의 여러 가지 맛은 인생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는 것이다. 커피의 쓴맛을 모르고서야 어찌 인생의 쓴맛을 논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반세기도 전 커피가 보편화되지 않은 이 땅에서 아침부터 커피를 마시며 그것의 맛과 향을 연구했던 시인. 집 근처 다방에서도 마시고, 집에서 손수 커피를 볶고 갈아 마시기도 했던 시인. 원두의 특성과 종류, 또 어떻게 거기서 제대로 된 커피를 추출할 수 있는지를 오로지 체험으로써 터득했던 시인. 무엇보다 커피 한 잔에서 인생의 깊이를 발견했던 시인. 김현승 시인은 커피를 가장 맛있게 마실 줄 알았던 사람이었다.
글쓴이 : 이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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