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는 쉽게 좋아하기 힘든 기호품이다. 특히 맨 처음 접한 커피가 오래되어 산화된 원두를 사용했거나 내리는 방법이 잘못되어 특유의 향과 풍미를 잃어버린 것이었다면 더욱 그렇다. 그냥 쓴맛이 나는 물이 되어버린 커피는 아무래도 좋아하기 힘들다. 베트남 커피를 처음으로 맛보았을 때가 그랬다. 언제 볶았는지도 모를 원두를 갈아 알루미늄 드리퍼에 넣어 내린 커피는 좋아하기가 힘들었다. 친구에게 여행 선물로 받은 것인데, 그래도 베트남의 특산물이라는 생각으로 억지로 한 봉지를 비우고 나서 선물로 받은 원두와 드리퍼는 선반 한구석으로 밀려났다.
그러다가 진짜 베트남 커피를 만났을 때, 무더운 호치민 시의 토요일 오후 노틀담 성당 옆의 카페에 앉아 카페 쓰어다를 시켜 맛보았을 때 베트남 커피에 대한 편견은 모두 사라졌다. 투명한 유리잔에 연유를 붓고 얼음을 넣고 드리퍼를 올려 한 방울씩 커피를 내린다. 나는 하얀 연유에 퍼져가는 커피의 브라운 운동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유리잔에 한 방울 한 방울씩 이슬이 맺힐 때마다 연해지는 커피와 우유 맛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혀끝에서 크림처럼 풀려 나가던 연유의 첫맛은 진한 커피의 쓴맛과 섞이며 티라미수처럼 입안에서 녹아 사라졌다. 30도를 넘나드는 날씨에 얼음이 녹으면서 연유는 점점 우유처럼 변했다. 마지막 한 모금은 내가 알던 카페라테의 맛이었다.
한국에도 연유를 넣은 커피가 있다. 세계적인 카페 체인점에서도 연유를 넣은 커피를 앞다투어 출시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너무 달다. 시중에서는 연유를 찾기도 힘들 뿐더러 찾았다 하더라도 십중팔구는 설탕이나 시럽을 듬뿍 넣은 가당 연유다. 태국이나 베트남에서 흔하게 발견할 수 있는 빨간 깡통에 든 무가당 연유는 크게 마음을 먹고 수입 식료품 가게를 찾지 않는 한 손에 넣기 힘들다. 2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미군 부대 앞에서 흔하게 팔리던 그 씨레이션 연유 캔이다. 흔하게 구할 수 있었던 연유와 전지분유들은 건강에 좋지 않다는 이유로, 신선한 우유보다 맛이 덜하다는 이유로 우리 주변에서 사라졌다. 그렇지만 씨레이션 깡통에 든 연유가 필요한 순간이 있다. 베트남식 커피인 카페 쓰어다를 마시고 싶을 때, 진한 타이식 밀크티인 차놈넨을 마시고 싶을 때, 이 구하기 힘든 싸구려 연유 깡통은 사람의 속을 보채기 시작하는 것이다.
안웅선 / 2010년 《세계의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탐험과 소년과 계절의 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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