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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에 쓰다

한 마리 돼지가 수놓는 인간의 하늘 (1)

1.

유튜브 링크는 애니메이션 〈붉은 돼지〉(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1992)의 사운드트랙인 〈때로는 옛이야기를〉이다. 엔딩 크레디트와 함께 흘러나오는 이 곡은 작중 ‘지나’의 목소리를 연기한 가수 ‘가토 도키코’가 불렀다. 영화음악으로 유명한 ‘히사이시 조’의 통속적인 멜로디에 읊조리듯 노래하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어느덧 엔딩 크레디트를 끝까지 보게 된다. 영화의 주제를 함축하고 있는 듯한 가사도 인상적이다. “가끔은 옛날이야기를 해볼까/ 익숙한 단골가게/ 마로니에 가로수가 창가에 보였던/ 커피 한 잔의 하루/ 보이지 않는 내일을 무작정 찾으며/ 누구나 희망을 걸었었지/ 흔들리는 시대의 뜨거운 바람을 맞으며/ 온몸으로 순간을 느꼈었지/ 그랬었지”. 노래가사의 화자는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들끓는 마음을 커피 한 잔으로 달랬던 옛날을 추억하고 있다.


새해 벽두. 지나온 시간을 돌이켜보고, 앞날을 그려보기 좋은 때다. 〈붉은 돼지〉가 나온 지 30여 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이 노래를 다시 찾아 듣는 것도 그 때문이다. 〈때로는 옛이야기를〉의 가사는 과거에 대한 그리움과 “지금도 여전히 다하지 못한 꿈”을 얘기한다. 사운드트랙인 만큼 가사의 내용과 정서는 〈붉은 돼지〉의 그것과도 밀접하다. 영화의 주인공 포르코는 과거를 그리워하면서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인물, 아니 돼지다.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며 앞으로의 삶을 다짐하는 데 〈붉은 돼지〉는 여러 생각거리를 던진다. 무엇보다 2019년 올해는 기해년(己亥年), 황금 돼지의 해. 한 돼지의 삶을 통해 이제 시작한 돼지의 해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듯하다. 그래서 새해 첫 지로스팅의 연재로서 이번 달은 〈붉은 돼지〉를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2.
인간이기를 포기한 한 사나이가 있다. 제1차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 공군 비행사로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전쟁 영웅 마르코 파곳. 전쟁의 참화로 친구들을 잃은 그는 인간의 삶에 환멸을 느끼고 흔쾌히 돼지를 자처한다. 돼지처럼 살겠다는 비유가 아니라 그는 스스로 마법을 걸어 진짜 돼지가 된다. 콧수염을 기르고 직립보행을 하며 열 손가락을 쓴다는 점을 빼면 그의 겉모습은 영락없는 돼지다. 주변 사람들도 모두 거리낌없이 그를 돼지라고 부른다.


포르코 롯소는 마르코가 돼지가 된 후 얻게 된 이름이다. 작중에는 ‘공적(空賊)’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비행정을 몰고 배를 약탈하는 하늘의 해적이다. 비록 돼지가 되었지만 조종술만은 여전한 포르코는 유명한 현상금 사냥꾼이 되어 이 공적을 소탕한 돈으로 먹고 산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붉은 돼지〉는 지중해 북부의 아드리아해를 무대로 공적과 대결하며 좌충우돌하는 돼지 포르코의 이야기다. 제목이 ‘붉은 돼지’인 것은 포르코의 비행정이 붉은색이기 때문이다.




3.
자신도 한때 인간이었지만 포르코는 영화 내내 인간을 향한 빈정거림을 그치지 않는다. 애국채권을 사서 민족에 공헌하라는 은행원의 권유에 포르코는 “그딴 것은 인간끼리 많이 하시오.”라고 대꾸한다. “돼지에게는 국가도 법도 없다.”라는 것이 그의 논리다. 실제로 그는 인간의 법률을 비웃기라도 하듯 여러 범죄를 저지르고 국가의 수배를 받고 있었다. 반국가 행위, 밀입·출국, 퇴폐 사상, 파렴치하고 나태한 돼지가 된 죄, 음란물 진열 등이 그의 죄명이다.


포르코는 왜 돼지에 더해 범죄자가 되는 길까지 마다하지 않은 것일까? “파시스트가 되느니 돼지인 편이 나아.” 공군에 돌아오라고 설득하는 옛 전우 페라린에게 포르코는 이렇게 말한다. 여기에 방금 전의 질문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가 숨어 있다. 〈붉은 돼지〉의 배경은 제1차세계대전이 끝난 1920년대 말이다. 이 시기 이탈리아는 파시즘이 득세하고 있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라는 미명 아래 공권력은 공공연히 국민을 감시했고 개인의 자유는 억압당했다.


포르코의 말에 이어지는 페라린의 대사는 의미심장하다. “모험 비행가의 시대는 끝났단 말이다! 국가라든지 민족이라든지… 그런 시시한 스폰서라도 두고 날 수밖에 없어!” 포르코는 대답한다. “나는 내 돈벌이로밖에 날지 않아.” 이때 ‘돈벌이’는 포르코의 물욕을 드러내는 표현이 아니다. 방점이 찍혀야 할 부분은 바로 ‘내’이다. 페라린이 현실과 타협한 인물인 반면 포르코는 국가와 민족의 이름으로 복종을 강요하는 세상에 홀로 맞서는 인물, 아니 돼지다. 자신의 자유와 신념을 지키기 위해 그는 기꺼이 돼지가 되기를 선택한다.
페라린은 포르코에게 “날아도 돼지는 돼지야.”라고 말한다. 포르코는 대꾸하지 않지만, 그는 어린 시절부터 친구이자 돼지가 된 후에도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는 여인 지나에게 앞서 이런 말을 남긴 바 있다. “날지 못하는 돼지는 단지 돼지일 뿐이야.” 이 말의 속뜻은 날아야 한다는 당위가 아니다. 날 수 있음에도 날지 않으면 정말 돼지가 되어버린다는 의미다. 포르코에게 외부의 압력에 굴복하여 스스로 자유를 놓아버리는 사람은 우리에 갇혀 사육되는 돼지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역설적으로 포르코는 인간이기 위해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이다. 그는 전쟁이라는 비인간적 상황과 파시즘의 광기로부터 자신의 인간성을 지키기 위해 인간의 꼴을 버린다. 인간이라는 굴레를 벗어던진 그는 이제 한 마리의 돼지로서 자유롭게 바다와 창공을 활보한다. 타인의 이목도 국가와 민족이라는 개념도 돼지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까닭이다. 그는 돈, 명예, 애국심 같은 인간적 가치에 얽매이지 않고 오직 자신의 신념과 욕망에 따라 행동한다.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 가지.” 포르코는 우리 속의 돼지가 아니라 하늘을 나는 돼지다.

...(계속)





〈붉은 돼지〉의 엔딩 크레디트와 〈때로는 옛이야기를〉

https://www.youtube.com/watch?v=WR1h0Xe2CwY



〈때로는 옛이야기를〉 한글 자막 버전

https://www.youtube.com/watch?v=7sZI-V6kW6M



글쓴이 : 이현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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