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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에 쓰다

한 마리 돼지가 수놓는 인간의 하늘 (2)




4.


모양새는 돼지지만 포르코의 행동은 누구보다 인간답다. 영화 초반 포르코는 그의 은거지인 무인도 해변에서 영화 잡지로 얼굴을 가린 채 음악을 들으며 낮잠을 자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포르코의 이러한 여유로움은 뒤이어 등장하는 공적들의 궁상맞은 몰골과 대조를 이룬다. 공적들은 광산 회사의 월급이 실린 배를 약탈하고, 포르코는 이들을 물리쳐 달라는 제안을 받는다. 그는 싼 일은 하지 않는다며 거절하지만 그 배에 어린 여학생들이 타고 있다는 말을 듣자 곧바로 일어나 비행정에 시동을 건다. “그건 좀 비싸게 먹히겠군!”이라는 말이 괜한 위악이었다는 것은 이후 구출한 아이들에게 쩔쩔 매는 그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사람들은 흔히 돼지라고 하면 아둔하고 지저분하며 욕심이 많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정반대다. 우선 돼지는 지능지수가 아주 높은 동물이다. 돼지의 지능지수는 75~85 정도로 평균 지능지수가 60인 개보다 더 똑똑하다. 이는 침팬지, 돌고래와 비슷한 수준이다. 또한 돼지는 매우 깔끔한 동물로서 잠자리와 배변 장소를 구분한다. 고정관념같이 머릿속에 박혀 있는 똥오줌을 뒤집어쓴 돼지의 이미지는 좁은 돼지우리 등 열악한 사육 환경에서 비롯한 것이다. 식탐은 돼지에 관한 가장 큰 오해다. 잡식성인 돼지가 음식을 가리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만, 여느 동물이 그렇듯 돼지도 적당한 양의 음식을 먹을 뿐 과식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붉은 돼지〉는 돼지에 대한 일반의 오해와 편견을 포르코의 인간다움을 부각하는 장치로 활용한다. 작중에서 포르코는 한 수 앞을 내다보는 노련함으로 곧잘 상대를 농락한다. 꾀죄죄한 공적들과 달리 옷차림도 항상 깔끔하다. 영화에는 전체를 통틀어 딱 한 번 등장인물이 몸을 씻는 장면이 나오는데 바로 포르코가 세수를 하는 모습이다. 포르코는 “목욕도 하지 않아 냄새가 진동을 하지.”라며 공적들을 놀리고, 맞수로 등장하는 커티스와 만나는 장면에서는 “난 깨끗한 걸 좋아하는 걸.”이라며 그와의 악수를 거절한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돼지의 본래면목을 보여주는 포르코 때문에 오히려 진짜 인간들이 돼지처럼 느껴진다. 특히나 저마다의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들 틈에서 지나를 향한 순정을 지켜가는 포르코를 보면 더욱 그렇다.​


영화의 절정인 커티스와의 일대일 대결은 포르코의 인간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는 자신을 향해 기관총을 난사하는 커티스를 상대하면서도 함부로 총을 쏘지 않는다. 둘의 대결을 관전하던 이들이 모두 의아하게 생각할 때 공적 두목인 맘마 유토는 이렇게 말한다. “저 녀석, 끝까지 쏘지 않을 생각이야. 돼지 녀석 살인은 하지 않아. (…중략…) 지금 쏘면 미국 녀석에게 맞아버릴 테니까. 상대가 지쳐서 얌전해지면 엔진에 두세 발 맞춰 끝장을 낼 셈인 거야. 전쟁이 아니라던가 뭐라던가… 아니꼬운 녀석이야.”​


자기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끝까지 상대에게 총부리를 겨누지 않는 돼지, 좋은 조종사의 첫째 조건은 ‘영감(Inspiration)’이라고 하는 돼지, “좋은 녀석들은 죽은 녀석들이야.”라며 죽은 친구들을 그리워하는 돼지, 양대 세계대전의 틈새에서 인간의 고결함을 지키려는 돼지, 인간을 혐오하여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했으면서도 누구보다 인간답게 행동하는 돼지…. 영국의 정치철학자이자 공리주의의 주창자로 잘 알려진 존 스튜어트 밀은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라고 말했지만, 〈붉은 돼지〉를 보노라면 ‘배부른 인간보다는 배고픈 돼지가 낫다.’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째서일까?


〈붉은 돼지〉의 첫머리를 유심히 보면 일본어, 이탈리아어, 한국어, 영어 등 10개 국어의 자막으로 영화의 배경을 설명한다. “이 영화는 비행정 시대에 지중해를 무대로 명예와 여인과 돈을 걸고 하늘의 해적과 싸워 ‘빨간 돼지’라고 일컬어진 한 마리 돼지의 이야기다.” 이 짧은 자막은 영화의 내용을 잘 요약하고 있지만, 이 영화가 품고 있는 질문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돼지로 살 것인가, 인간으로 살 것인가. 나는 지금 돼지인가, 인간인가. 돼지의 탈을 쓴 인간인가, 인간의 탈을 쓴 돼지인가.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붉은 돼지〉는 한 마리 돼지를 앞세워 우리에게 이런 물음을 던진다.










5.


이야기가 자못 심각하게 흘렀지만 〈붉은 돼지〉는 한 편의 오락영화로도 손색이 없다. 지중해의 푸른 바다와 하늘을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는 비행정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보는 즐거움이 있다. 포르코는 물론 그에 맞서는 공적과 커티스까지 등장인물들은 모두 하나같이 유쾌하다. 포르코와 지나 그리고 포르코의 비행정을 새로 만들어주는 피오의 삼각관계를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산소 결핍으로 인해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작품, 그것이 바로 〈붉은 돼지〉가 되어야 한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말처럼 〈붉은 돼지〉는 남녀노소 누구나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다.





글쓴이 : 이현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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